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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율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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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홋카이도(北海道)는 에도 막부 말기에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제안한 명칭으로, 1869년 11개 국 86군으로 홋카이도가 설치되었다. 1869년 홋카이도 설치 이후, 1882년 개척사가 폐지되고 3현이 설치되었으며, 1886년 3현이 통합되어 홋카이도청이 설치되었다. 1947년 홋카이도 지사가 선출되면서 다른 도도부현과 동일한 지방 자치체가 되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홋카이도 내에서는 주로 연안부를 중심으로 도로가 형성되었고, 주요 도로로는 오슈 가이도의 마쓰마에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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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율령제)

2. 명칭 유래

7세기 후반에 성립된 고키시치도의 사이카이도(西海道일본어), 난카이도(南海道일본어), 도카이도(東海道일본어) 등의 도 이름을 모방한 것으로, 명명자는 에도 막부 말기에 에조치를 탐험한 松浦武四郎|마쓰우라 다케시로일본어로 알려져 있다.

마쓰우라는 아호를 홋카이도인(北海道人)이라고 지을 정도로 에조치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1869년 그는 에조치의 명칭으로 홋카이(北加伊), 가이호쿠(海北), 가이토(海島), 도호쿠(東北), 지시마(千島), 히다카미(日高見)의 6가지 후보를 제안했다. 마쓰우라는 의견서에서 가이(加伊)는 선주민인 아이누인들이 이 섬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가이를 같은 발음의 가이(海)로 바꾸어, 고키시치도의 명칭을 모방해 홋카이도(北海道)로 정했다.

마쓰우라에 따르면 오토이넷푸 인근의 한 마을에서 촌장으로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카이'(カイ)라고 부른다는 말을 듣고 홋카이도라는 이름을 창안했다고 하나 아이누어 학자였던 긴다이치 교스케는 아이누어에 '카이'(カイ)라는 단어가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카이'(カイ)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3. 역사

아스카 시대에는 아베노 히라후에 의한 원정이 행해졌고, 와타리도 등 홋카이도에서의 일본인의 거주는 오래되었으며, 오슈 후지와라 씨의 잔당도 도외에서 도망쳐 오는 등 가마쿠라 시대에는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무로마치 시대 이전의 도난 12관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에는 사할린과 함께 마쓰마에 번의 소령이 되었다.


  • 1869년(메이지 2년) 홋카이도 (11국 86군)가 설치되었다.
  • 1870년부터 1871년(메이지 3~4년) 혼간지 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때, 삿포로 군내 (후의 삿포로시 미나미구 스다레마이)에 숙소 중 하나로 스다레마이 통행소가 설치되었다.
  •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에 따라 관번 (구 마쓰마에 번)의 구령 (이시 군, 히야마 군, 쓰가루 군, 후쿠시마 군)에 관현 설치. 하코다테 부 (하코다테 현)의 관할이었던 기타 지역은 홋카이도 개척사의 소관이었다.
  • 같은 해 9월 관현은 도외의 히로사키현 등과 합병, 히로사키현 (아오모리현)의 일부가 되어 소멸되었다.
  • 1872년(메이지 5년) 10월 후쿠시마 군 등 4군 (구 관현)이 아오모리현에서 개척사로 이관되어 홋카이도 전역이 개척사의 소관이 되었다.
  • 1872년부터 1873년(메이지 5~6년) 삿포로 본도가 건설되었다.
  • 1882년(메이지 15년) 개척사가 폐지됨과 함께 도내에는 하코다테현, 삿포로현, 네무로현의 3현이 설치되었다.


그 후, 1886년(메이지 19년)에는 하코다테현, 삿포로현, 네무로현이 다시 통폐합되어 새롭게 홋카이도청 장관을 장으로 하는 홋카이도청이 설치되었다. 그 후 다른 지역과는 달리 부현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1947년(쇼와 22년)에 장관을 폐지하고 다른 도도부현과 마찬가지로 공선제에 의한 홋카이도 지사가 지방 자치체로서의 홋카이도의 장이 되었다.

4. 행정 구역

홋카이도는 1869년(메이지 2년) 설치 당시 11국 86군으로 구성되었다. 10주 섬(홋카이도 본섬. 북주·에조치라고도 불렸다)에서 쿠릴 열도(쿠릴국)에 걸쳐 설치되었다. 이는 현재의 홋카이도 행정 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4. 1. 1869년 설치된 11국

1869년 홋카이도에 설치된 11국은 다음과 같다.

10주 섬(홋카이도 본섬. 북주·에조치라고도 불렸다)에서 쿠릴 열도(쿠릴국)에 걸쳐 설치된 11국 86군으로 구성되었다.

5. 도로

홋카이도의 도로는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발전했다. 주로 연안부를 중심으로 도로가 형성되었으며, 마쓰마에 번의 지행지(知行地)나 어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홋카이도 내의 주요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홋카이도 내에서는 마쓰마에 번에 의해 개척된 '장소'라고 불리는 마쓰마에 번 가신의 지행지(상업(장소) 지행제 및 장소 청부제 참조)나 어장을 연결하기 위해 주로 연안부에 도로가 형성되었다.[1] 특히 공의 어료로 지정된 시기에 많은 공사가 이루어져, 그전까지 육로가 끊어져 배 등을 이용했던 곳을 새롭게 개척하고, 각지에 여관소(숙소)를 설치하여, 도내 각지로의 연중 육로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1]

※ 도내의 오래된 도로에 대해서는, 다이쇼 14년(1925년) 6월 10일에 홋카이도청에서 출판된 『홋카이도 도로지』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5. 1. 주요 도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홋카이도 내의 주요 육상 교통로는 주로 연안부에 형성되었으며, 특히 공의 어료로 지정된 시기에 많은 공사가 이루어져 육로가 끊어졌던 곳을 개척하고 각지에 여관소를 설치하여 연중 육로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1] 여관소는 운상옥(회소)에 숙소 기능을 갖게 한 것 등이 있었다.[1] 또한, 하천에는 번 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14곳의 도선장이 있었고, 이시카리 국의 이시카리 도선을 시작으로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1]

간세이 연간부터 분세이 연간, 그리고 막말까지 도난의 오시마국・하코다테에서 도토와 지시마국 방면으로의 육상 교통이 정비되었다.[1] 하코다테에서 에토로프 최단부까지는 282리(1107.5km)였다.[1] 주요 공사는 다음과 같다.

공사명내용
오샤만베-아부타 간 도로야마코시 군과 아부타 군의 경계를 넘는 길로, 간세이 11년 막부의 명령으로 마쓰마에 번이 개설했다.[1] 교와 3년 쓰가루 번이 도로 폭을 확장했다.[1] 현재의 국도 37호선 시즈카리 고개의 전신이다.[1]
무로란-호로베쓰 간무로란에서 호로베쓰까지 육로로 연결했다.[1]
사마니 산길과 사루루 산길간세이 11년 오코치 젠베이가 개설하고, 난부 번이 수선했다.[1] 국도 336호선의 전신이다.[1]
루베시베쓰 산길간세이 10년 곤도 주조가 개설했다.[1] 국도 336호선 골든 로드의 전신이다.[1]
구시로-앗케시 간 도로구시로 군에서 앗케시 군에 이르는 길로, 간세이 11년부터 12년에 걸쳐 개설되었다.[1] 현재의 도도 네무로 하마나카 구시로선의 전신이다.[1]
네무로-아쓰베쓰 간 도로만엔 원년 후지노 키헤이가 개설했다.[1]



화인치 지역 내를 연결하는 주요 공사는 다음과 같다.

공사명내용
후쿠야마-카미노쿠니 간 산길안세이 4년 다테 린자에몬이 개척했다.[1] 현재의 도도 이시자키마쓰마에선의 전신이다.[1]
키코나이 산길분카 연간에 에도 막부가 수축했다.[1] 현재의 도도 에사시키키코나이선의 전신이다.[1]
우즈라 산길(오노고에)안세이 5년 에사시의 진에몬, 쓰가루의 쇼헤이 등이 개척했다.[1] 현재의 국도 227호의 전신이다.[1]
군카와 신도안세이 3년 안바라 칸사이와 하코다테 봉행이 개척했다.[1]
쿠로마츠나이 고개안세이 3년 우타스츠 장소 청부인 마스야 에이고로의 아버지・사다에몬 등이 개척했다.[1] 현재의 도도 스츠쿠로마츠나이선의 전신이다.[1]
치토세 고개분카 연간(1804-1818년)에 야마다야 분에몬이 개척했다.[1] 국도 36호선의 길목에 해당한다.[1]
삿포로 고개 신도(치토세 신도)안세이 4년(1857년) 하코다테 봉행이 개척했다.[1]
우류고에분카 5년(1808년)에 루모이 지배인 야마다야 분에몬이 개척했다.[1]



도동(道東) 지역 내를 잇는 주요 교통 시설은 다음과 같다.

시설명내용
아바시리 고개분카 5년부터 분카 7년에 걸쳐 시라누카 군에 재임한 막부 관리 오쓰카 코타로의 지휘로 개척되었다.[1] 현재의 국도 240호선의 전신이다.[1]
샤리 고개원래는 에조 (아이누)의 통행로였지만, 분카 원년 전후 (1804년 전후)에 하치오지 센닌 도신 센닌가시라 하라 타네아츠에 의해 개수・개척되었다.[1]


5. 2. 메이지 시대의 도로 건설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원사 도로나 에도 시대의 도로를 기반으로 확장된 삿포로 본도 등 도난과 도오삿포로를 잇는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를 시작으로, 도토나 도호쿠 내륙부 등에서도 도로가 건설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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